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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개혁, 지금이 바로 그 때다.

검찰 수립 이후 69년이 흘렀습니다. 지속해서 크고 작은 잡음들을 만들어내던 검찰은 결국 지난 정부에서 국민적 비난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교수를 민정수석으로 내정한 가장 큰 이유 역시 ‘검찰개혁’ 때문입니다. 이에 지난달, 조 민정수석은 검찰개혁은 “내년 6월 지방선거까지는 끝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을 정도로 단호한 의지를 밝혔습니다. 우리나라 검찰의 막강한 권력은 어디서부터 시작됐고, 문제는 무엇인지 살펴야 개혁의 방향을 이해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우선, 상(上)편에선 정부마다 검찰과 관련된 굵직한 사건들을 통해 검찰의 역할과 정치 권력과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시간은 역순으로 내려가겠습니다.

검찰개혁, 검찰의 역사부터 알아보자.

박근혜 정부, 검찰과 같이 몰락하다

검찰과 정부의 관계가 가장 돈독 했던 시절입니다. 정부 부처에 진출한 전·현직 검찰 출신들이 앞을 봐주고 뒤를 수습하는 등의 일은 비일비재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2014년 정윤회 문건. 당시 제대로 된 수사를 하지 않은 검찰은 의혹의 근거가 된 청와대 문건 유출 수사에만 집중했습니다. 최순실 실체가 2016년이 돼서야 드러난 건 검찰의 부실수사 탓이었습니다.

이밖에도 검찰은 ‘소극적인 수사 태도’로 정부의 뒤를 봐주었습니다. 2016년 한 해만 살펴보아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초기 수사,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자금 지원을 받고 관제시위를 한 대한민국어버이연합 수사, 세월호 참사 때 이정현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의 KBS 보도 통제 의혹 수사, 경찰의 고 백남기 농민 물대포 직사 의혹 수사 등 청와대와 정부를 향한 수사는 진행이 더뎠습니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빼앗긴 정의, 침몰한 검찰>(보고서)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에서 작성한 <빼앗긴 정의, 침몰한 검찰>(보고서)에는 정권의 눈치를 봐온 문제적 수사를 20개로 정리했습니다. 참여연대는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부터 매년 검찰 활동을 분석해 검찰권 오·남용 문제 등을 지적해왔습니다. 3월10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를 인용하면서 이번 보고서는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이자 지난 4년을 종합하는 결과물이 됐습니다.

이명박 정부, 검찰과 정부가 돈독하던 시절로 회귀

검찰은 ‘다시’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던 과거로 돌아가게 됩니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과 같이 정권만을 위한 ‘정권 안보 기구’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게 됩니다.

이명박 정부 임기 전반기에 검찰은 ‘정치검찰’로서 활동합니다. 검찰은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수입 쇠고기의 문제점을 다룬 MBC-TV <PD수첩> 제작진에 대한 수사와 기소, 소비자 주권 차원에서 조·중·동 광고주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인 시민들에 대한 수사와 기소, 2008년 촛불 집회 참가자들에 대한 가혹한 사법 처리, 정연주 KBS 사장에 무리한 수사와 기소,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에 대한 압수·수색 등 무리한 수사, 인터넷 포털 사이트 등 인터넷 공간에서의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기 위한 압수·수색,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의 구속과 기소,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통한 공안 사건의 부활, 용산참사 사건에 대한 부실·편파 수사 논란 등을 일으켰죠.

언론장악

2008년 8월 12일 정연주 KBS 사장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혐의’로 긴급체포한 일이 있습니다. 재판부에 부쳐진 이유는 사장 재임 중에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혐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정연주 전 사장의 무리한 사업 확장이나 사업운영실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2005년 국세청을 상대로 한 법인세 부과 취소소송에서 승소한 뒤 재판부의 중재 권고로 국세청과 합의를 통해 항소심을 취하했는데, 이때 회사가 돌려받아야 할 돈을 다 받지 못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였습니다. 정 전 사장은 법원의 조정 권고를 수용했을 뿐이었습니다. 법리적으로 맞지 않는 검찰의 기소는 비난받았습니다. 대통령이 정 전 사장을 해임할 수 있게끔 검찰이 배임죄를 적용해 기소한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2009년 정연주 전 사장은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2010년 무죄를 선고받은 MBC_TV의 시사프로그램 <PD수첩> 역시 정부의 눈에 벗어나는 보도를 했다가 검찰에 의해 강제 수사를 당했습니다.

표적 수사

사실 가장 큰 사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몬 ‘박연차 게이트 사건 수사’입니다. 이 사건은 박연차가 태광산업에 대한 특별세무조사를 무마하고자 청탁한 일에서 시작됐습니다. 사건의 본질은 세무 조사를 막기 위해 박연차가 이명박 정부의 실세들을 상대로 벌인 로비였습니다. 그런데 검찰의 칼날은 엉뚱하게 노무현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향했습니다. 근거 역시 구속된 박연차의 진술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대검 중수부는 노무현에 대한 전격적인 수사에 나섰고 가족과 관련된 압박에 타격을 입은 노무현은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며 결백함을 증명했습니다. 국민은 이 사건을 통해 무소불위 권력의 검찰이 정치권과 합심할 때 나타나는 폐해를 지켜보게 됐습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의지는 강력했으나 반쪽짜리 개혁

검찰은 노무현 정부 당시 역대 어느 정권보다 확실하게 ‘중립성’과 ‘독립성’을 보장받았습니다. 검찰이 정권유지 수단으로 사용되면 안 된다는 노무현의 확고한 생각 덕분이었습니다. 문제는 검찰이 정권에 좌지우지되진 않았지만, 내부적으로 견고해졌다는 것입니다. 중립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독립성을 갖게 되니 검찰은 더욱 폐쇄적이고 독선적인 관료조직이 됐습니다.

결국 검·경 수사권 조정도 공수처(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설치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 검찰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 가운데, 검찰은 임기 내내 청와대 참모들과 대통령의 친인척들, 후원자와 측근들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추진한 대가로 생각하고 묵묵히 받아들였다. …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러웠다. 이러한 제도 개혁을 하지 않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 한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운명이다』, 노무현재단 엮음, 유시민 정리, 돌베개, 2010.

검찰에 권력을 쥐여주다

취임 후 노 전 대통령은 국정원장의 독대 정보 보고를 받지 않았습니다. 국세청을 정치적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데 이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정적에 대한 세무조사도 없었고, 재벌에 대한 특별 세무조사도 사라졌습니다. 검찰을 정부의 권력에서 놓아주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검찰·경찰 수사권을 조정했고, ‘고위 공직자 비리 수사처’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정부가 검찰에 권력을 내준 사례는 16대 대선 수사입니다. 2004년 16대 대선 수사 당시, 노무현 정부의 검찰은 정권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롭게 수사했습니다. 검찰의 수사 결과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약 823억 원, 노무현 후보는 약 113억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돈을 주고받은 많은 이들이 형사처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불법 대선 자금 사건에 100억 원의 불법 자금을 제공한 삼성, LG, 현대자동차 그룹 등 재벌그룹의 총수는 검찰 조사도 받지 않았습니다. 고래는 빠져나가고 피라미만 처벌받은 격이었습니다. 거대 재벌의 힘만 확인시켜준 엉터리 수사이자 반쪽 수사였습니다. 그런데도, 불법 대선 자금 수사는 검찰이 정치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집권 초기의 살아있는 권력과 야당을 함께 수사 대상으로 삼고 한국 정치의 부끄러운 민낯을 들춰냈기 때문입니다. 집권 2년 차 강력한 대통령의 권력 아래 수사가 가능했던 데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의지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정부와 검찰의 냉전기

노 전 대통령과 검찰은 2003년 3월 9일 ‘검사와의 대화’ 자리 이후 긴장 관계에 돌입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검사들을 철수시키고, 2004년에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폐지도 밀어붙였습니다. 사법개혁추진위원회 등을 통해 검찰의 기소독점주의를 견제하고 공판중심주의를 도입했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국정원과 경찰청 등 권력 기관은 물론 군까지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를 만들었지만, 검찰은 과거사 정리와 반성을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검찰은 과거 무고한 사람을 고문하고 죄를 만들어 기소한 사례가 적지 않았습니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 임기 내내 참모와 측근들을 집요하게 공격했습니다. 검찰 개혁은 무력화됐습니다. 대통령에서 멀어지는 것을 검찰은 권력에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김대중 정부, 노력의 결과는 ‘특별검사제도’

민주 정부 출범으로 검찰 개혁을 구상하고 노력했지만 큰 변화는 없었습니다.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특별검사 도입’이 노력의 결과라 볼 수 있습니다. 특별검사는 검찰 조직에 속하지 않으면서 검사와 동일한 수사와 기소권을 갖는 제도입니다. 일반 검사와 달리 검찰총장의 지휘·감독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검찰조직의 막강한 권력을 견제하는 수단이며 검찰 내부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김대중 정부 당시 특별검사제도는 세 번의 큰 활약을 펼쳤습니다.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부인 옷 로비 의혹, 대검찰청 공안부장 진형구의 한국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 전자는 외화밀반출 혐의를 받고 있던 신동아그룹 최 회장의 구명을 위해 그의 부인이 김태정 검찰총장 부인 등에게 고가의 옷을 선물하며 로비를 한 사건이었습니다. 검찰총장 부인의 의혹 수사를 검찰에게 맡기는 것에 대해 국민은 의심의 눈길을 보냈습니다. 후자는 1999년 6월 7일, 대검찰청 공안부장 진형구가 점심 반주 후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다 폭로된 사건이었습니다. 진형구는 1998년 11월 공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일어난 한국조폐공사의 파업은 본보기를 삼기 위해 검찰이 유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검찰은 이 발언은 진형구의 단독범행이라 결론 냈지만, 파문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결국 ‘한국조페공사 노동조합 파업 유도 및 전 검찰총장 부인에 대한 옷 로비 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의 법은 통과되었습니다. 2001년 이용호 게이트 역시 특별검사제가 도입된 사례입니다. ‘주식회사 지엔지 대표이사 이용호의 주가 조작 횡령 사건 및 이와 관련된 정관계 로비 의혹 사건 등의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이라는 이름의 법이었습니다. 김대중 정부 당시 세 차례 특별검사제가 도입된 것입니다.

특별검사제도는 임시적인 제도이지만 세 차례의 계기를 통해 의미하는 바가 컸습니다. 검찰에 대한 불신을 특별검사제도를 통해 공정성과 신뢰성을 보존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검찰에겐 스스로 중립성과 공정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수치스러운 제도일지 모르지만, 검찰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크다는 점을 알려준 중요한 신호였습니다.

김영삼 정부, 정권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검찰 결정

첫 문민정부의 등장에 12·12사태의 피해자들은 전두환을 내란목적살인죄로 대검찰청에 고소했습니다. 12·12 군사 쿠데타와 5·18 광주 학살을 자행한 이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검찰청은 기소유예로 불기소 처분했습니다.

세 가지 이유에서였는데 국론 분열 우려, 전두환, 노태우 등이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로와 남북통일 상황을 대비해 국가 안정을 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피해자들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고발했고 1995년 7월 피고소·피고발인 58명 모두에게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습니다. 검찰은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와 정치 활동 금지, 국보위 설치 운영 등 당시의 일련의 조치는 정치적 변혁 과정에서 기존 통치질서를 대체하고 새로운 헌법 질서를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쉽게 말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군사반란과 내란 목적 살인이라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국가의 처벌을 면할 수 있게 해준 건 다름 아닌 검찰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의 여론과 저항에 ‘5·18 민주화 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1995년 12월 21일)이 제정됐습니다. 검찰은 이에 특별법이 공포되기도 전에 전두환, 노태우 등을 체포한 뒤 군사 반란, 내란 목적 살인죄 등으로 구속기소 했습니다. 대법원은 1997년 4월 17일 전두환에게 무기징역형, 노태우에게 징역 17년 형을 확정했습니다. 검찰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였습니다. 특별수사본부가 구성된 직후 한 검사는 기자에게 자조적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개다. 물라면 물고, 물지 말라면 안 문다.”

몇 달 전만해도 전두환 등이 국가에 끼친 공로가 있기에 기소유예 처분한 검찰이 여당과 대통령의 움직임에 따라 처벌하는 180도 변화된 태도는 검찰의 실체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국민의 분노가 쌓여 정치 권력을 움직이고, 정치 권력이 다시 검찰을 움직여야만 검찰에 의한 법의 심판이 가능해졌다. 검찰은 그저 ‘정권의 하수인’일 뿐이었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 ‘인권 수호 역할’을 못한 검찰의 암흑기

검찰이 국민의 ‘인권’을 지켜주지 못한 암흑기입니다. 물론 경찰의 힘이 막강하고 고문은 일상이었지만 검찰은 매 순간 침묵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김근태 고문사건’과 ‘부천 성고문 사건’입니다.

전두환 정권 퇴진 운동을 지속해서 벌이던 민주화운동 청년연합 의장 김근태는 1985년 9월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습니다. 11차례의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확인한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는 고문 경찰관들을 서울지검에 고발했습니다. 하지만 서울지검은 이 모두를 무혐의 결정했습니다. 후일 김근태 사건 담당 검사는 “다리를 절룩거려 고민이 있었을 것으로 직감했으나 수사해달라는 명확한 의사를 밝히지 않아 수사하지 않았다”고 변명했습니다. 심지어 검찰 고위간부들의 고문 은폐대책회의가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인권의 수호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법이라는 요식절차를 이행하는 공무원일 뿐이었다.

비슷한 시기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터졌습니다. 서울대 학생 권인숙은 노동 현장 취업을 위해 주민등록증을 위조했다는 ‘공문서 변조죄’ 등의 혐의로 부천경찰서에 연행되어 수사를 받았습니다. 권인숙은 순순히 자백했습니다. 하지만 수사 담당자 부천서 형사 문귀동은 더 큰 사건을 뒤집어씌우기 위해 성고문을 자행했습니다. 권인숙과 그의 변호인단은 문귀동을 강제추행죄로 인천지검에 고소했지만, 검찰은 “권인숙이 조사받은 방은 안이 들여다보이는 곳이고 다른 경찰관들이 옆방에서 날씨가 무더워 모두 문을 열어 놓고 왔다 갔다 하는데 성고문이 있었다는 주장은 인정할 수 없다”성고문 ‘혐의없음’을 결정했습니다.

게다가 검찰은 보도자료를 배포하면서 “급진좌파 사상에 물들고 성적도 불량하여 가출한 자가 성적 모욕이라는 허위사실을 날조·왜곡하여 자신의 구명과 수사기관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정부의 공권력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라고 발표했습니다. 후에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안기부와 문화공보부에서 작성한 보도자료를 검찰이 그대로 읽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검찰은 그저 앵무새 역할까지 감행했습니다.

박정희 정권, 검찰은 독재 정권의 하수인

인민혁명당 사건, 정당 기소 거부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은 조선노동당 강령을 토대로 발족하여 전국 학생 조직에 현 정권이 타도될 때까지 학생 시위를 계속 조종함으로써 북한이 주장하는 노선에 따라 국가를 변란하고 남북평화통일을 성취할 것을 목적으로 활동해왔다”면서 수십 명을 검거했습니다. 혐의는 ‘반공법 위반’이었습니다.

검찰 내부에 의견이 갈렸습니다. 인민혁명당 사건을 송치받은 이용훈 검사 등 4명의 검사는 철저한 수사를 통해 피의자들의 혐의를 입증한 증거가 없으니 기소를 포기해야 한다고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지검 검사장 서주연은 ‘빨갱이 사건’은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며 기소를 하든 검사직을 물러나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했습니다. 이용훈 검사는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서울지검장은 당직 검사에게 이 사건을 기소하도록 지시했고 공소가 제기되었습니다. 재판 결과 47명의 수사 대상자 중에서 2명만이 1심에서 유죄가 입증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인민혁명당은 반국가단체도 아니었고 북한과 내통한 이들도 아니었습니다. 후에 국정원 발전위원회는 이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날조된 조작 사건이라 밝혔습니다. 정치 권력의 요구 때문에 검찰은 기소장을 내주던 조직이었고 이를 따르지 않은 용기 있는 자들은 조직을 떠나야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재벌 비리 눈감아주기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이 일으킨 사카린 밀수 사건. 삼성의 이병철이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와 한국비료의 공장을 건설하면서 건축 자재를 수입한다는 명목으로 몰래 사카린 60톤을 숨겨 들어왔습니다. 설탕 대용으로 쓰이는 단맛 나는 합성 감미료 사카린을 시중에 유통시켜 거액의 자금을 조성하려다 발각된 것입니다.

검찰은 이병철의 차남 이창희와 삼성그룹 관련자들을 구속 기소했습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아들이 감옥을 가는 선으로 타협한 것입니다. 검찰은 대형 불법 비리 사건이 터졌는데도 정권과 재벌, 그리고 중앙정부의 조율을 거쳐 미리 짜인 각본에 따라 충실하게 움직였습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물론 국가에 피해를 입힌 사건은 흐지부지 마무리됐습니다.

이번 정부에서 검찰은 어떤 수식어가 붙게 될까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인 1948년 10월 31일 권승렬이 초대 검찰총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검찰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독재정권 당시 정권의 하수인이었던 검찰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다행스럽게 변화하고 나아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법정 견제장치가 없으며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는 모습 또한 볼 수 있었습니다. 검찰개혁, 언제까지 미뤄야 할까요. 그리고 검찰 권력을 나눌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엔 무엇이 있을까요. 검찰개혁 (하) 편에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