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기회의 땅인 미국이 국경을 걸어 잠갔습니다. 이번에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지 일주일 만에 서명한 행정명령 탓입니다. 테러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무슬림 국가들을 대상으로 미국 입국을 금지한 것인데요. 이미 발급된 10만 명에 달하는 무슬림 이민자의 비자도 취소되었습니다. 이들 국가는 물론 미국 내에서도 트럼프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안보를 위한 '작은' 대가?
이번 행정명령은 특정한 국가 출신의 입국을 일시적이지만 직접 제한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무슬림 7개 국가(이라크, 시리아, 이란, 수단, 리비아, 소말리아, 예멘)는 최소 90일간은 미국을 입국할 때 필수적인 비자 발급이 중단되며 입국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구로 따지면 1억 3천 4백만 명이 그 대상입니다. 앞으로 120일 동안은 시리아의 난민을 받지 않겠다는 내용도 포함되었죠.
트럼프의 생각은 단순합니다. 이슬람 신도를 뜻하는 무슬림은 테러를 일으킬 가능성이 큰 매우 위험한 사람들인데 이들이 미국에 대해 어떤 감정과 목적을 가지고 입국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죠. 미국을 테러 등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일단 이 사람들이 미국에서 돌아다니는 것부터 막자는 겁니다. 종교와 인종 차별로 인한 문제보다 미국인의 안전과 국가의 안보가 더욱 중요하다는 입장이죠.
공황장애 온 전 세계 공항들
트럼프 대통령이 행정명령에 서명한 직후, 국가의 관문인 공항에서부터 큰 혼란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장 375명이 미국행 비행기 탑승을 거부당하거나 미국 공항에 도착해 억류되었습니다. 에미레이트와 카타르 항공 같은 중동 국적의 항공사들은 7개 국가 출신의 승무원 배치를 다시 조정해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항공사 승무원도 행정명령에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뉴욕 JFK 국제공항 등에는 트럼프의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수천 명에 달하는 시위대가 모여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우리도 미국인 안 들인다
무슬림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한 것에 분노한 이란은 즉각 보복에 나셨습니다. 미국인에게 더 이상 비자를 발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건데요. 지난 2015년에 이란과의 핵 협상이 타결되면서 좋아졌던 사이가 다시 벌어지는 모양새입니다. 영국에선 올해 중으로 예정된 트럼프 대통령의 국빈방문을 취소하라는 온라인 청원이 이어졌습니다. 지금까지 영국 국민 185만여 명이 서명을 한 데에 이어 무슬림 이민자 출신인 사디크 칸 런던 시장도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내가 알던 미국이 아니다
미국 내 각계각층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정치권에서는 여야 할 것 없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요. 대선 맞수였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이것은 우리의 모습이 아니다” 라고 말했고, 찰스 슈머 민주당 상원의원은 “자유의 여신상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며 개탄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속한 공화당조차 오히려 무슬림을 자극해 미국 내 테러가 늘어날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는 상황인데요. 민주당 내부에선 트럼프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16개 주 법무장관들도 헌법을 위반하는 비미국적인 결정이라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인재를 놓칠까 걱정하는 기업들도 강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창업자를 포함한 임직원 중에서 이민자 비중이 높은 IT 기업들이 적극적입니다. 구글은 우리 돈 47억 원을 들여 이민자, 난민 기금을 조성하고 해외에 나가 있는 직원들을 즉시 귀국하도록 했습니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등도 최고경영자가 나서 행정명령에 영향을 받는 직원들의 소송절차를 지원해주기로 했습니다.
그 무엇도 나를 막을 순 없다
국경을 넘나드는 거센 비판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정부와 다른 목소리를 낸 법무부 장관 대행을 경질하는가 하면 행정명령이 잘못되었다는 판결을 내린 1심과 2심 판사들에게도 인신공격성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법원의 판결에 대해 대통령이 개입하는 건 사법부의 독립성을 해친다는 점에서 또 다른 논란을 만들어내기도 했죠. 그가 새로 임명한 이민관세국장은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하겠다며 장단을 맞춰주고 있습니다.
“일개 판사가 우리나라를 그렇게 위험에 빠뜨리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와 사법체계를 비난하라”
브레이크 밟은 법원
의회의 역할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대통령의 행정명령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법원의 무효 판결뿐입니다. 지난 2월 초, 시애틀 연방 지방법원에서는 행정명령 시행을 미국 전역에서 중단하라는 판결이 나와 7개국 국민의 미국 입국이 다시 허용되었습니다. 법무부는 납득할 수 없다며 즉각 항소했지만, 연방항소법원에서도 같은 결론이 나왔습니다. 재판 결과를 받아든 트럼프는 판사들을 비판하며 대법원까지 가서 끝판을 보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시즌 2로 다시 돌아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수정된 내용이 담긴 반이민 행정명령 2탄을 준비 중입니다. 앞서 두 번이나 퇴짜맞은바 있는 기존의 행정명령을 대법원까지 끌고 가기엔 부담이 있다는 것이 배경인데요. 새롭게 발표될 행정명령은 다소 완화된 수준에서 나올 것이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국내 여론은 트럼프에게 유리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행정명령 가운데 일부 규제에선 여론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데요. 불법체류자를 보호하는 도시에는 연방정부의 자금 지원을 끊어 불이익을 주겠다는 내용입니다. 이민법을 전반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여론도 77%에 이릅니다. 국민 다수가 불법 이민에 대한 문제의식과 제도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상황이죠. 그가 곧 내놓을 행정명령 2탄에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