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화폐개혁

지갑에 있는 만원짜리 오만원짜리 지폐가 갑자기 휴지 조각이 된다면 어떨까요? 인도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출처가 불분명한 돈을 일컫는 ‘검은 돈’ 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기위해 화폐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그의 용감한 결정은 인도를 바꿀 수 있을까요?

Ed, flickr (CC BY)

'검은 돈' 과의 전쟁 선포

연말까지 돈 바꿔가세요

11월 8일에 발표된 모디 총리의 개혁안은 세계적으로도 수십년만에 이뤄진 대담한 화폐개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고액 화폐권에 해당하는 500루피와 1000루피 지폐 사용이 전면 금지되었는데요. 한국 돈으로 500루피는 8천 6백원, 1000루피는 1만 7천원입니다. 이 지폐를 가진 사람은 연말까지 새롭게 발행되는 500루피와 2000루피 신권으로 교체하거나 은행에 예금해야 합니다. 기간을 넘긴 구권 지폐는 말 그대로 그림과 숫자가 그려진 종이 쪼가리가 되는거죠.

멘붕이 온 국민

갑작스럽게 진행된 화폐개혁에 국민들은 혼란스럽습니다. 인도는 인구의 2%만이 신용카드를 사용하고 은행 계좌로 거래하는 사람이 15%에 불과합니다. 그만큼 현금으로 거래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얘기죠. 게다가 사용이 중지된 구권 지폐 2종은 현재 인도에서 유통 중인 화폐의 86%에 달합니다. 구권 지폐를 교환하려는 사람들은 생업을 포기하고 은행이나 현금지급기에 긴 줄을 서고 있습니다. 한번에 교환할 수 있는 금액의 한도가 정해져 있고 신권 발행도 늦어지면서 혼란은 가중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화폐개혁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모디 총리가 불 보듯 뻔했던 혼돈을 감수하고 화폐개혁을 추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불법적인 거래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현금인 ‘검은 돈(Black Money)’을 근절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큽니다. ‘검은 돈’이란 뇌물이나 마약거래, 매춘처럼 시장에 공개되지 않고 비밀리에 흘러다니는 돈을 말합니다. 인도에서는 정치인과 부자들의 부정부패에 동원되는 불법적인 자금을 상징하고 있죠. 이런 ‘검은 돈’은 정부의 규제를 받지 않고 세금도 부과되지 않기 때문에 국가를 병들게 하는 ‘암 덩어리’ 로 불립니다.

어느 나라에나 부정부패는 존재하지만 인도의 사정은 더욱 심각합니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인도의 비공식적인 경제를 전체 경제규모의 20%로 추산했습니다. 올해 인도의 부패방지순위는 세계 76위로 오랫동안 하위권에 머물고 있기도 합니다. 모디 총리도 취임 때부터 부정부패 척결과 경제회생에 강한 의지를 보여왔는데요. 취임 후 2년 반동안 별다른 성과가 없자 화폐개혁이라는 칼을 꺼내들었습니다.

의도는 좋은데...

당장은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큽니다. 우선 이번 화폐개혁이 충분한 준비 없이 진행되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데요. 모디 총리의 전임이었던 싱 전 총리는 검은 돈을 근절하겠다는 화폐 개혁의 목적은 이해한다면서도 사전 준비가 부족했고 관리도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제로 일부 은행은 구권을 바꿔 줄 신권이 턱없이 부족해 무거운 동전 꾸러미로 대신 지급해 국민의 불만을 샀습니다. 현재 시중에 풀려있는 구권 중 신권으로 교환된 비율은 7%에 불과합니다.

화폐개혁이 실질적으로 '검은 돈'을 근절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사람도 늘고 있습니다. 정부가 화폐개혁 실시를 발표한 이후, 다량의 현금을 갖고 있는 부자나 기업들이 구권으로 금을 사서 해외로 내보내는 움직임이 있었죠. 또 조직적으로 사람들을 동원해 신권으로 교환하려는 정황도 발견되고 있는데요. 화폐 개혁의 본래 목적과는 다르게 신권이 다시 ‘검은 돈’이 되는 건 시간 문제라는 지적입니다. 야당은 애꿎은 대다수의 국민들만 불편하게 만드는 정책이라며 전국적으로 반대 시위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인도의 경제 지표도 줄줄이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인도 주식시장에서 우리 돈 2조 2천억원이 넘는 주식을 팔았습니다. 유명 투자 은행인 골드먼삭스는 인도의 경제성장률을 기존의 7.6%에서 6.8%로 수정하기도 했습니다. 루피화 가치도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죠. 현금 유통이 정상적으로 되지 않아 소비가 줄어들어 인도 경제상황이 나빠지는 우려가 반영되었습니다. 인도의 재무부 장관조차 단기적으로 소비가 둔화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놨습니다.

조금만 참아주세요

정부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화폐 개혁에 공감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모디 총리는 국민들이 느끼는 수고와 불편을 이해한다면서 국민들에게 조금만 더 버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신권 교환이 마감되는 12월 30일 이후엔 국민들이 희망해왔던 인도를 국민들에게 안겨주겠다고까지 약속했죠. 재무부 장관은 현재 검은 돈이 은행에 회수되고 있는 중이라면서 중장기적으로 인도의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거들었습니다.

모디 총리는 ‘검은 돈’ 척결이라는 화폐 개혁의 본래 취지를 살리기 위한 노력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세법을 개정해 부정한 돈을 가진 사람들의 자진 신고를 유도한 것인데요. 탈세 목적으로 보관중인 현금을 스스로 신고하면 세금을 내고 50%를 가져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끝까지 신고를 하지 않다가 적발된 돈에 대해선 85%까지 세금을 물리기로 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며 편법으로 현금을 숨기기보다 자발적으로 ‘검은 돈’을 드러내도록 기회를 준 겁니다. 경제 전문가들은 이런 돈이 10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113조원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부탁한다. 50일이다. 50일만 내게 달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불편하다만 기대해본다

매일 계속되는 국민들의 불편과 혼란에도 여론은 긍정적입니다. 모디 총리는 응답자의 92%가 화폐개혁에 찬성했다는 조사 결과를 공개했습니다. 인도의 한 일간지도 구권 지폐를 다시 사용하자는 야당의 주장에 국민의 78%가 반대했다고 밝혔습니다.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바라는 국민들의 바람이 그만큼 크다는 것인데요. 모디 총리가 약속한 연말까지 신권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 국민들의 불편이 지속된다면 이들의 인내심도 그렇게 오래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